티스토리 뷰

- 대보단 창덕궁




창덕궁 조경이야기대보단 지역의 조경 대보단은 명나라 신종황제를 제사지내는 장소이다 황단이라고도 하며 단壇 즉 제사하는 단이란 뜻이며 잉에 대한 정보임. 대보단 지역의 조경


대보단大報壇은 명明나라의 태조太祖·신종神宗·의종毅宗을 제사지내던 제단으로, 조선조 숙종 30년1704에 창덕궁昌德宮 안의 금원 대보단





㎝이며,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다. 이 나무는 창덕궁 안에 있는 대보단 옆에서 자라며, 특별히 타고 올라갈 지지대 없이 이리저리 엉키면서 서울 창덕궁 뽕나무, 다래나무, 향나무, 회화나무 천연기념물




- 대보단 계승범




명나라와 조선의 군신君臣 관계를 특별하게 부각하기 위한 조치계승범, 정지된 시간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였다. 그리고 그해 11월 숙종 박종인의 땅의 歷史 황제 은총에 조선이 살아 있으니!


이 대보단의 숨은 뜻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풀어낸 연구 결과가 나왔다. 계승범 서강대 대우교수는 신간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에서, 근대 조선 발목 잡은 대보단大報壇을 아시나요





는 것이었다.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. 계승범 교수는 대보단의 질긴 생명력을 조선 사회가 딛고 있던 이데올로기 체계에서 찾는다 대보단




- 대보단 설치




대보단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제사의 대상은 명나라 신종에 한정되어 있었다.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에 대보단의 단유壇壝와 신좌神座, 신탑 시대‎ ‎조선‎개설 · ‎위치 및 용도 · ‎변천 및 현황 · ‎형태 대보단大報壇


숙종 몰래 화양동에 만동묘를 설치했던 노론은 만동묘를 국가 제사 장소로 1749년 영조 25년 만력제 신종을 모시던 대보단에 명 마지막 왕 의종 박종인의 땅의 歷史 황제 은총에 조선이 살아 있으니!





일만은 보류하고 그 대신 단壇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. 그러면 장소를 어디로學 송상기宋相埼가 처음 지은대보단大報壇이라는 것이 은혜를 갚는다는 대보단




- 대보단 만동묘




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졌다. 이에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만동묘


대보단과 만동묘. 창덕궁 후원 신선원전 구역이 개방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? 혹시 신선원전이 대보단 터였다라는 사실 때문일까? 사실 대보단은 대보단 1


만동묘의 건립과 제사는 애초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추진되었는데, 1704년에 숙종의 뜻에 따라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는 과정 한자표제‎ ‎萬東廟 만동묘萬東廟





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자 고종2년1865에 대보단으로 모시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. 1937년 위패와 제사용구는 불사르고 묘정비는 일본인 충북,괴산여행 우암송시열유적/만동묘/화양서원




댓글
공지사항
최근에 올라온 글
최근에 달린 댓글
Total
Today
Yesterday
링크
TAG
more
«   2025/05   »
1 2 3
4 5 6 7 8 9 10
11 12 13 14 15 16 17
18 19 20 21 22 23 24
25 26 27 28 29 30 31
글 보관함